일본 최초 선교사 노리마씨 마사야스와 수원 동신교회 – 국민일보 기사

[한국기독역사여행] 일본 최초 선교사 노리마쓰 마사야스와 수원 동신교회

‘동신교회’, 일제의 기독교 장악 과정 보여줘

입력 2017-12-08 15:20 수정 2017-12-08 15:50

수원 화성 화홍문과 동북각루를 배경으로 동신교회가 보인다. 일본인 최초의 해외 선교사 노리마쓰는 1897년 한국에 들어와 동신교회를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을 선교지로 삼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 화홍문과 동북각루에 오르면 눈 아래 수원천과 용연이 어우러져 한국적 비경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다.

지난 4일 화홍문 누각에 오르니 일본인 여성 관광객 2명이 열심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눌러댔다. 누각 창살 너머 저편에 버드나무가 늘어진 수원천이 흐른다. 수원천은 청계천과 같이 걷기 좋은 코스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찍은 사진에 1900년 무렵의 일본인 선교사 삶이 담긴 교회가 찍혔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화홍문과 동북각루에서 130m 거리에 일본인 선교사가 세운 동신교회가 있다. 교회는 수원천을 앞에, 미션스쿨 삼일학원 캠퍼스를 뒤로 뒀다. 교회 마당은 텃밭이다. 주변 건물에 비해 교회가 낡았다.

동신교회는 일본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쓰 마사야스(1863~1921)에 의해 설립됐다. 120년 전통의 교회이나 군소교단 기독동신회 소속이라 아는 이가 드물다.

수원 화성 화홍문과 동북각루를 배경으로 동신교회가 보인다. 일본인 최초의 해외 선교사 노리마쓰는 1897년 한국에 들어와 동신교회를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을 선교지로 삼았다.

동신교회 본당에 들어서면 1909년 찍은 귀한 사진 한 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북각루와 성벽을 배경으로 한 초가 교회 사진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된다. 조선소나무가 울창하고 초가 마당에선 어린이들이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특이한 것은 초가 입구가 일본식 현관이고 그 앞에 일본 전통복장을 한 남성들도 보인다. 조선소년들의 길 가던 모습도 찍혔다. 그해 9월 신축했던 이 건물 명칭은 ‘수원성서강당’이었다.

노리마쓰는 시고쿠(四國) 북서부 출신으로 사무라이 집안 장남이었다. 그는 가나가와 현청 공무원으로 살아가던 중 일본 최초 개신교회인 요코하마카이간교회 성도였던 노자매 집에 하숙을 하면서 이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새 삶을 살게 된 노리마쓰는 장래가 보장된 관직을 버리고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에 입학, 주의 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재학 중 니혼바시교회에 파견돼 설교 담당자로 헌신하게 되는데, 이때 영국인 선교사 H. G 브랜드를 만나 신앙의 노선 변화를 겪게 된다. 브랜드는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운동 교파인 플리머스형제단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였다.

‘일본 기독동신회 100년사’는 노리마쓰가 니이가타현 호족집에 기거하며 전도활동을 하던 중 그 집에서 박영효를 만나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 망명 중이었다.

한편 노리마쓰를 따랐던 후쿠다는 “청일전쟁 후 조선에 비참한 사건(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났을 때 노리마쓰가 매우 가슴 아파 했으며 조선의 비극적 상황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신앙적 결단을 하게 되어 조선 땅을 밟게 됐다”고 기록했다.

노리마쓰는 1897년 12월 11일 고베를 출발해 27일 밤 제물포항에 닿았다. 강추위에 한강 물이 얼어 배 운항이 중단돼 말을 빌려 타고 서울로 진입, 진고개의 한옥에 짐을 풀었다. 그는 이때 관립 일어학교 학생 조덕성(1875~1935)을 만나 한국어를 배웠으며 또한 그를 전도했다. 1904년 이 두 사람은 월간 ‘성서증언’을 창간한다.

일본 관광객이 화홍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다.

노리마쓰는 서울에서 노방전도에 힘썼다. 브랜드 부부가 이듬해 찾아와 그를 도왔다. 수원 이주는 노방 전도 중 수원출신 성도 한 사람이 수원에 복음을 전해 줄 것을 청하면서 이뤄졌다. 기독동신회와 플리머스형제단 교회가 지금도 경기 남부에 집중돼 있는 이유는 노리마쓰가 동신교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시작된 것이다. 1899년 일시 출국한 노리마쓰는 늦은 나이에 사토오와 결혼을 했고 이듬해 장남 요시노부를 서울에서 얻었다. 그리고 이해 8월 수원 전도를 결심하고 4개월 된 아들을 안고 걸어서 수원으로 이사했다.

수원 정착 한 달도 안 된 9월 1일. 다음은 노리마쓰가 한국인 첫 열매를 맺었다는 편지 내용이다.
“서문 밖 서호에 쉬러 갔는데 한 무리의 부인들이 항미정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러서 저희 가족이 있는 것을 보고 떡 등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잡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노인 이창민씨가 신앙을 고백하고 정자 아래 폭포수 밑에 내려가 침례 받고자 해 주의 이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동신교회는 군소교단 기독동신회의 출발점이다. 미자립교회이나 역사성이 주목받고 있다

노리마쓰는 철저히 현지인이 돼 살았다. “노리마쓰는 의복도, 식기도, 주택도 모두가 조선식으로 살았다. 네다섯 살 된 아들 요시노부가 조선어 밖에 할 줄 몰랐다. 일부러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에 놀랐다. 이것이 노리마쓰의 조선 전도가 축복 받은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아사다 마타사부로오의 증언)

그는 처음 수원 장안동 초가에서 살았다. 후원자가 없던 선교활동은 쉽지 않았다. 부부는 짚신을 신고 다니며 전도지를 나눠주었다.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안약을 넣어주었고, 또 씻겼다. 어른들에게는 치통과 피부병 약을 주어 낫게 했다. 그는 안성과 이천, 멀리 충주와 평양까지 나가 전도했다.

노리마쓰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어서 남에게 손을 벌리지 못했다. 먹을 것이 없어 비지로 연명하다 쓰러지기까지 했다. 또 장안동 집 뜰의 감나무가 옆집으로 넘어가자 감을 수확해 그 반을 그 이웃에게 줬다. 늘 검소하고 인자했다. 이렇듯 한국식으로 살며 어떻게든 이웃을 살피는 그를 동네 사람들은 ‘성자’로 불렀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보릿고개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지방의 성도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노리마쓰는 아내 사토오에게 식사준비를 요청했다. 그러나 쌀통에 쌀이 없었다. 눈물짓던 사토오는 궁리 끝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달비로 팔아 쌀을 샀다. 가난한 전도자의 순종하던 부인 사토오는 결혼 10년째 폐렴으로 투병했다. 죽기 전 그는 어린 4형제를 모아 놓고 말했다.

자른 머리카락을 팔아 방문한 지방 성도를 대접했던 부인 사토와 아이들. 장안동 집회소 대문 앞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을 믿고 사이좋게 지내라. 엄마는 예수님 곁에 가도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너희들을 사랑하며 보호해주시니까 항상 예수님을 의지해라. 예수님이 곧 오실 때 또 만날 수 있으니까…” 사토오는 수원 광교산에 묻혔다.

노리마쓰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1900년대 초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서양 선교사도 아닌 일본 선교사가 조선인의 고통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리마쓰는 일본제국이 조선인을 핍박, 학대하는 것에 성서를 근거로 강력 비판했다. 일본 ‘복음시보’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전도 일화도 있다.

“러일전쟁 직후 남쪽지방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차 안에서 언문 전도지를 나눠줬다. 그 중에 일본인이 있어 일본어 전도지를 건네자 ‘조선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난 일본인이야. 러시아를 해치운 일본의 무력을 잘 알고 있지. 너희들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겠느냐’ 하며 전도지를 짝짝 찢어 버렸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도 일본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검을 가지고 일어서는 자는 검으로써 망합니다. 무력의 위광이 조선을 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리석은 정신입니다…’.”

노리마쓰는 훗날 일본 기독교단체들이 침묵하는 가운데서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에 대해 로마서 13장 말씀을 인용, 하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정치의 본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치자도 피치자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난 것은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이 정의로운 요구입니다.”(복음시보 1919년 10월)

강점기 문부대신을 지낸 아베는 ‘노리마쓰 마사야스에 대해’란 글에서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경성제국대학에 15년간 있었다.…이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가 있다. 3‧1독립운동 시위에 군대가 출동하여 민중을 살해하였다. 그 이후 (조선인은) 모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중에서 단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조선인의 친구로서 흠모받고 있었다. 그 이름이 노리마쓰이다.”

동신교회 뒷동산의 노리마쓰 추모비를 바라보는 한효성 목사.

노리마쓰는 1921년 한국 전도여행을 계속하다 폐렴으로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죽기 전 그가 말했다. “주님의 손에 일체 맡겼으니 아무런 남길 말이 없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조선의 전도다. 조선에 뼈를 묻고 싶다.”

그의 유골은 부인 사토오 옆에 묻혔다. 조선 성도들은 비석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시작도 사람을 위해, 마감도 사람을 위해…몸소 사명을 띠고 그 모든 소유를 버리고 부부가 한 마음으로 복음을 조선에 전하였노라….’

노리마쓰 마사야스(1863~1921)

오늘날 ‘수원성서강당’터인 동신교회로 일본 기독교인들이 가끔 방문한다. 그들은 초라한 교회와 기념비를 보고 마음 아파한다. 미자립 동신교회가 얼마나 버틸지 염려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120년 전 한국인을 사랑한 노리마쓰가 세운 교회가 ‘조선의 영화 수원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신교회’, 일제의 기독교 장악 과정 보여줘

동신교회가 교파에 소속되는 과정은 일본이 조선침략 당시 종교 장악을 통한 황국신민화를 획책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소위 ‘장․감·성’ 등으로 불리는 기독교파와 여타 종교를 통제코자 종교 등록제를 실시했다.
노리마쓰는 애초 무교파주의를 택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종교선포에 관한 규칙’을 발령, 강제적인 등록을 받는다.
노리마쓰는 1906년 11월 조선총독부에 ‘선교계(宣敎届) 및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그 명칭이 ‘야소교’였다. 그는 ‘어떤 파에 속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파를 만들지 않는다’고 적었으나 일제는 이를 ‘기독동신회’라고 불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굳어졌다.

수원=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