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가 걸어온 길

1909년에 신축한 수원동신교회

기독동신회는 1896년 12월 23일 일본 형제 모임의 노리마쯔 마사야쓰 선교사의 전도로 진고개에서 첫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 명칭을 영락정 성서강당이라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1898년 영국인 일본 형제 모임 선교사 허버트 브랜드(Herbert G. Brand)가 내한하여 조선의 복음사역에 동참하면서

브랜드 형제가 서울 지역 선교를 맡고, 노리마쯔 형제는 1900년 수원시 매향동으로 옮겨서 전도하여 1909년에는

집회장소(교회)를 신축하고 건물 명칭을 성서강당이라 불렀다.

서울 모임을 이끌던 브랜드 형제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정세가 불안해지자 동년 12월 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초기의 전도자들 (1918년)
초기의 전도자들 (1918년)

그 후에 조덕성, 조덕환 형제를 비롯한 한국 형제들이 서울 모임을 인도하며 모임이 점점 성장하게 되자 1932년에는

종로구 돈의동에 집회소(교회)를 신축하고 영락정에서 이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8년부터 부평 미군부대에서 복무하던 미국인 형제들과 미국인 형제모임에서 온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형제들도 돈의동 집회소에서 함께 모이다가 1961년 교리적인 논쟁 끝에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박준형 형제를

비롯한 한국인 형제 일부가 분리되어 나가 노량진 모임을 시작했다.

서울 모임은 1977년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고 모임 명칭을 기독동신회 서울중앙교회라고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제 모임의 역사

1375년 영국의 위클립(John Wycliffe)이 교황의 무오설과 평신도 만찬 포도주 분급을 금지하는 천주교리에 항거한 사건이

발생했고, 위클립을 따랐던 존 후우스(Jan Haus)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목회하면서 교황청에 맞섰다가 1515년에 화형을

당했다.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들을 이어 종교개혁을 마무리했다.

종교개혁 이후 1600년대, 유럽에는 종교의 자유를 찾는 청교도 그룹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 중에는 은혜 형제 모임과

메노 형제모임 등이 있었다.

1722년 독일의 진젠돌프(N. Zenzendorf)의 도움으로 보헤미아에서 유럽의 형제모임들이 모여 모라비안(Moravian) 형제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때 모라비안 형제 모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 바로 영국의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다.

모라비안 형제모임은 사도시대 이후 최초의 교회 공동체였음이 기독교회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1825년 모라비안 형제 일부가 영국 플리머스(Plymouth) 지방으로 이주해 와서 영국의 플리머스와 브리스톨 지방에 정착해서

살다가 영국 국교회의 부패상을 보고 국교회에서 탈퇴하여 형제들끼리 가정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이 들의 지도자는 다비(John N. Darby), 그로브(Anthony Groves), 벨렛(John G. Bellet), 뉴턴(Ben. Newton), 뮬러

(George Mueller), 그리고 모세오경 주석과 세대주의 신학으로 개신교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챨스 맥킨토시

(C. H. Mackintosh) 등이며, 이 들 모임을 플리머스 형제모임(Plymouth Brethren Assembly)이라 불렀다.

이들의 신앙생활 핵심은 만찬집회와 성직계급이 없는 만인사제 교리이다. 특정 건물이 아니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모이는 모임을 가졌고, 성경 연구에 열심이었다.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개신교회

근본주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례는 침례를 하며, 주일예배는 만찬집회와 말씀증언(Witness-체험 중심의 설교) 중심의 건덕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 후에 조덕성, 조덕환 형제를 비롯한 한국 형제들이 서울 모임을 인도하며 모임이 점점 성장하게 되자 1932년에는 종로구

돈의동에 집회소(교회)를 신축하고 영락정에서 이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8년부터 부평 미군부대에서 복무하던 미국인 형제들과 미국인 형제모임에서 온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형제들도 돈의동 집회소에서 함께 모이다가 1961년 교리적인 논쟁 끝에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박준형 형제를

비롯한 한국인 형제 일부가 분리되어 나가 노량진 모임을 시작했다.

서울 모임은 1977년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고 모임 명칭을 기독동신회 서울중앙교회라고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